2021. 2. 6. 11:12
우리는 아직 토독토독 (http://posty.pe/nhxc72)과 이어지는 글입니다.
눈을 떴다. 사위가 검고 희미했다.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내뱉는다. 묘하게 가라앉은 따듯한 어둠이 윤기를 반긴다.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 홀드 버튼을 누르자 어둠을 찢으며 강한 빛이 윤기의 얼굴로 쏟아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한참을 노려본다. 아 염병 알람 3분 전. 손에 힘이 풀리고 폰이 아슬하게 뺨을 스치고 베개로 떨어진다. 윤기가 회갈색의 부들부들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는다.
비 오는 날 上
김남준 민윤기
꼼꼼하게도 쳐놨던 암막 커튼을 촥 소리 나게 열어 재꼈다. 기다리던, 눈을 찌르는 아침 햇볕이 아닌 눅눅하게 방울져 흐르는 것들이 창문에 툭툭 부딪힌다. 창문 덕에 만져질 리도 없는데 그게 꼭 누구 같아 윤기는 창문에 와 툭 부딪히고 제 형태를 잃고 흐르다 고여버리는 비를 손으로 훑었다. 밖이 온통 회색이고 또 축축하다. 꽉 맞물린 창문 틈으로 날리도 없는 희미한 늦봄의 비 냄새가 세는 것 같아 킁킁거려본다. 발에 닿는 차가운 마룻바닥을 느끼며 느리게 걷는다. 불을 켜려고 손을 뻗었다 툭 손을 떨궈버린다. 잔뜩 뭉친 어깨가 뻐근하고 컴컴한 아침이었지만 윤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들떴다. 이런 것들을 사랑했다. 따듯한 어둠, 포근히 윤기를 감싸는 자연스러운 명도, 까아만 암막 커튼과 회갈색 이불보, 밝은 회색의 단추가 달린 잠옷과 자신의 새카만 머리카락 같은 것들.
침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날씨가 늦봄으로 접어들었다. 거실 난방을 안 하기 시작했더니 아침마다 침실문을 열면 차가운 공기가 몸을 휘감는다. 그걸 매년 알면서도 까먹고 다시 깨닫고 까먹음의 연속이다. 윤기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쳐둔 아이보리색 카디건을 걸치고 몸을 옹송그리다 고심 끝에 드디어 침실 문을 열고 나선다. 나오자마자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화장실로 향한다. 물만 대충 묻혀 고양이 세수를 마친 후 좋아하는 찻잔을 찾아 꺼낸다. 유자 시럽이 담긴 찐득한 유리병을 꺼내 찻잔에 듬뿍 담았다. 탁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포트의 빨간 불이 꺼지면 뜨거운 물이 튀지 않게 조심조심 찻잔에 물을 부었다. 사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유자는 무슨 누구의 말에 따르면 뭔 사약 같은 시커먼 커피만 빈속이 때려 넣었을 텐데 그 누가 선물해준 아이보리색 카디건이, 냉장고의 유자 시럽이 그리고 그의 잔소리가 윤기를 커피 대신 유자차로 떠밀었다. 뜨거운 유자차가 식기를 기다리며 다시금 확인한 핸드폰 화면의 메신저 미리 보기 창에 윤기는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애써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리며 뭉뚱한 손가락으로 토독토독 자판을 두들긴다. 나름 행복한 아침이었다.
"형 집 지겨워"
"나만큼 지겹겠냐"
"그러니까 나가자니까 왜 집으로 오래"
남준이 툴툴거리며 우산을 털었다. 야 야 막 털지 말고 좀. 현관에 물 좀 튀면 안 되냐? 니가 우산 부러트릴까 봐 그러는 거거든?
"참내 아무리 그래도 내가 비 좀 턴다고 우산이 부러지겠냐"
딱!
"부러지네"
윤기가 혀를 찾고 남준이 허망하게 부러진 제 2만 원 짜리 검은색 장우산을 바라보았다. 와 말도 안 돼.
"너는 좀 매사에 니 신체를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내가 백날천날 말하면 뭘하냐 들어 처먹질 안는데"
아아. 남준이 바보 같은 소릴 내며 부러진 우산대를 잡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좋아하는 빈티지샵에서 보자마자 넌 내거야 하고 집어 든 게 이주 전이었고 저걸 들고 싶어서 비와라 비와라 염불을 했는데 딱 한 번 남준 손에 들리고 제 수명을 다해버린 우산을 잡고 남준이 애처롭게 손을 떨었다. 난 진짜 저주받았나 봐. 그걸 이제 알았냐.
신발을 어정쩡하게 벗고 계속 현관에서 허망하게 제 손과 우산을 번갈아 쳐다보는 남준을 보다가 윤기가 그 손을 덥석 잡아 끌었다. 손을 야무지게 움켜잡고 몸을 휙 틀어 남준을 질질 끌어다가 소파에 앉혔다. 으아 남준이 또 이상한 소릴 내며 거칠게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부볐다. 대가리가 돌았나. 커다란 놈이 바보짓하고 저러고 앉아있는 게 퍽 귀여워 보여서 윤기는 남준의 머리에 슬쩍 제 앞발을 올려놓고 토닥토닥해본다. 제 얼굴을 쓸던 손을 올려 남준이 윤기의 손을 붙잡아 내려 뺨에 가져다 대고 부빈다.
"뭐하냐"
기가차하는 목소리와 다르게 귀가 조금 발긋해진걸 남준도 윤기도 모른다.
"위로"
"누가 누굴"
"민윤기 손이 김남준을"
"징그럽다 놔라"
놓으라고 한 주제에 남준이 놓기도 전에 손을 털어버리곤 윤기는 주방을 향한다. 남준도 겉옷을 벗어 소파에 던져두고 윤기를 따라 주방으로 향한다. 윤기가 추운지 주방 한켠에 아무렇게나 구겨졌던 아이보리색 카디건이 몸을 다시 욱여넣는다. 어 우리 커플룩이야. 남준이 제 아이보리색 조끼를 가리키며 말했다. 씩 웃는 얼굴에 보조개가 패이자 윤기가 치를 떤다. 너 노렸지. 뭐가. 전혀 모르겠다며 남준이 능청을 떨었다. 노리고 조끼 그거 입구 왔지.
"그럴 리가 형이 내가 선물해준 가디건을 잘 입고 다녀서 커플룩이 되어버릴 줄 어떻게 알고 같은 색 조끼를 입고 왔겠어?"
일부러 구구절절 말하는 게 능청맞고 뻔뻔했다. 원래 능청을 민윤기 영역이고 부끄러워하는 건 김남준이었는데. 나이 먹고 느는 게 능청뿐인지 사회생활 덕인지 여튼 뻔뻔해져서는.
"점심 먹었지?"
"엉 근데 좀 출출하다"
윤기가 그럴 줄 알았다며 밀가루와 쪽파를 꺼낸다.
"뭐야?"
"파전 해 먹게"
"헐…. 형 비 오는 날에 파전에 막걸리"
남준이 싱크대 앞에 서서 쪽파를 씻는 윤기 뒤로 가 어깨를 감싼다.
"징그러 임마 떨어져"
"형 막걸리는?"
"냉장고 봐봐 남은 거 있을 텐데"
"응"
대답과 다르게 큰 덩치를 구겨 윤기의 어깨에 대고 한참을 밍기적 거리다 냉장고를 연다.
"반도 안남았는데?"
"아 그래? 언제 먹었지"
"뭐야 형 집에서 혼자 막걸리 마셔? 아저씨네"
"너 막걸리에 대한 그런 편견은 접어라 그리고 저번 주에 친구 와서 마신 거거든?"
"친구? 누구?"
"말하면 아냐 있어 같이 등단한 애"
"여자? 남자?"
"남자"
"몇 살?"
"호구 조사하냐? 가서 막걸리나 좀 사와"
남준이 찜찜한 얼굴로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윤기를 보다가 겉옷을 챙겨입었다.
"형! 나 여기 우산 하나 들고 간다"
"엉"
윤기가 퇴사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생긴 변화 중 하나는 자연스럽게 인간관계가 갈리는 것이었다. 전까지야 대학이며 회사에서 주구장창 붙어있었고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제외하면 니 지인이 내 지인이고 내 지인이 니 지인이였는데 그마저도 윤기와 남준이 같은 동네의 중고등학교를 다녔어서 그리고 윤기의 몇 없는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이미 입이 마르고 닳게 들은지라(몇몇은 남준과 함께 술자리를 갖은 적도 있었다.) 주변인들을 줄줄 꾀고 있는 남준이었고 윤기도 마찬가지로 남준의 친한 동창들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여튼 말하면 니가 알아? 가 아니라 얘 알지? 가 먼저였는데 이런 식으로 문득문득 거리감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형 지인들 얘기를 해달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사실 딱히 궁금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냥 그 느낌이 싫었다. 누군가는 내가 모를 민윤기의 어떤 면을 안다는 것.
사람은 도면이나 캐드로 그려 낼 수도 치수나 원리를 정리할 수 없었다. 겉껍데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속을. 다 아는 것 같다가도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또 너무나 낯설다가도 내가 아는 누군가 이기도 했다. 그리고 김남준한테 민윤기라는 사람은 그 어떤 인간군상보다 어렵고 아리송한 사람이다.
민윤기는 뾰족해 보이지만 맹탕 같고 맹탕 같지만 뾰족한 인간이었다. 그니까 겉으로 보면 뾰족하고 그 형이랑 조금 친해지다 보면 잔정많고 물렁한 사람인데 그 안을 더 파고들면 거긴 다시 뾰족하다. 민윤기는 알아도 모른 척하고 몰라도 아는척하는데 도가 튼 놈이었고 더불어 사기꾼 기질도 농후한 지라 남준은 어느 정도 윤기와 친분을 쌓기 시작하면서 윤기만큼 어려운 인간은 없었다. 모르겠지 싶으면 다 알고 있고 다 알겠지 싶으면 아무것도 몰랐다. 근데 또 그게 모르는 척인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다시 아리송해진다. 눈치가 빨랐다. 김남준이 주의를 기울여 머리를 쓰는 거라면 민윤기는 그냥 타고난 감이 존나게 좋았다. 그래서 처음에 남준은 흐리멍텅하다 마주치는 눈이 저를 다 안다는 듯 굴어 재밌다가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저 없이 남준에게 던지는 말에 뼈가 있어 꺼려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름의 카테고리에 분류되는 사람이었는데 민윤기는.
남준의 그 카테고리는 제 인간관계 축약본 같은 거였다. 필요할 때 빨리 찾아 쓸 수 있도록. 인간관계에 머리 쓰는 것은 당연한 거라 남준은 사람을 카테고리별로 나누고 그에 맞게 용도를 부여하길 거리낌 없어 하는 편이었다. 누가 속물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고 그냥 어깨를 올렸다 내리고 어쩌라는 표정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타입. 물론 그런 상황은 머리 나쁜 애들이나 만드는 거였고 머리 좋은 김남준한테는 해당 사항 없다.
누울 곳은 봐가며 다리를 뻗고 사람은 상대를 봐가며 알맞은 처신을 한다. 필요의 정도를 계산하고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한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히 계산적인 사람 같지만 아니라고 못 하겠다. 필요의 정도라는 기준에 제 호감 또한 들어가는 거니 그렇다고 소시오패스 취급하면 곤란하고. 만나면 무익하고 재밌는 사람과 유익하고 재미없는 사람, 말이 통하는 사람, 안 통하는 사람, 안 통하고 지루한 사람, 안 통해도 웃긴 사람 ,재미도 없고 무의미하지만 그의 지인이 필요한 사람, 그도 아닌 사람. 남준 머릿속에 평균적으로 평가 가능한 몇 가지 분류 기준이 존재하고 의식했든 안 했든 그의 지인들은 그 분류를 기준으로 착착 정리된다. 머릿속은 깔끔하고 그럴수록 후회 없는 인간관계를 유지해왔다. 똑똑하게 구는 편이다. 인간관계에 멍청하게 굴면 고생하는 건 몸만이 아님을 직접 깨달은 건 아니고 안 겪어도 안다. 적당히 똑똑하고 적당히 허접하게 굴고 마음은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내보이는데 신경쓰는 편이었고 보이고 싶은 면만 보여주는 법은 그냥 타고난 편이었다. 어휴 어휴 재수 없어 정 털려. 그런 모습을 내보일 때마다 윤기의 한결같은 반응이었고 그러면서도 윤기가 자신의 그런 면모에 지대한 흥미가 있음을 알았기에 남준은 제 카테고리를 윤기에게 내보임에 주저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샌가 남준이 열심히 정리한 카테고리는 무슨 그것들을 왕창 부숴놓고 그 위에 새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애웅애웅 거리고 있는 거였다. 고양이는 손재주가 좋고 글을 쓰고 눈 깜박하면 집안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놓고 지만큼 하얗고 매가리 없어 보이는 담배를 뻑뻑 피운다. 기분 좋을 땐 그 까끌한 혀로 남준을 핥아 줄 것처럼 가까이 왔다가도 손을 내밀면 물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려워 어려워 민윤기가 어려워.
윤기의 우산을 비가 토독토독 두들긴다. 남준이 그 모습을 멍하게 응시하다 발을 빨리한다. 그냥 우리 시간낭비 그만하고 연애나 하면 안 될까? 울컥 목울대까지 차다가도 애써 다시 목구멍으로 욱여넣는다. 신중히 해야 한다. 사실 너무 오래 신중히 해서 계속 제자리걸음인 것도 같긴 한데 차고 들끓는 감정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잘못했다 그와 나의 8년을 망쳐버릴까 봐. 강제적 접점이 사라진 상태. 하고자 한다면 어렵지 않게 영영 안 보고 살 수도 있는 상황이 망설임을 만든다. 하지만 망설임은 쌓여 임계점을 넘고 얕은 호감은 완연한 사랑의 이름을 달아버린 거라 김남준은 제 카테고리와 논리를 해체해 그 잔해 위에서 늘어져라 하품 중인 고양이 한 마리와 이제 뭐라도 해야만 한다.
공부한다고 트위터는 비활시켜놓고 글은 쓰는 인간......
+제목이 마음에 안들어서 언제 바뀔지 모름
+성격에 대한 이야기는 원래 그냥 사귀기 전 꽁냥거리는 게 보고싶었던거라 안할려고 했었거든요. 근데 이 시리즈는 스토리를 정해둔건 아니고 그냥 제가 쓰고 싶을 때마다 쓸거라 길어질 수도 있겠다 싶어서캐릭터는 잡아놓으려고요. 그래서 비 오는 날 상, 하편은 윤기랑 남준의 성격 얘기가 나오지 않을가 싶네요. 근데 저도 몰라요. 귀찮으면 보고싶은 것만 쓸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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