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6. 11:03
축의금 만원만 넣을걸.
민윤기가 길게 담배를 빨았다. 아까웠다. 빳빳한 오만원권이 3장이나 들어간 돈 봉투가 아까웠다. 그 돈이면 담배가 서른세 갑인데 시발. 찌질하고 소소한 분노가 일었다. 정호석과의 관계에선 죄다 그 모양이었다. 하나 줄 거 5개나 줘버리고 이미 줘버린 거 찌질하게 아까워나 하지 말지 뭐가 다 그리 아깝고 아쉬워서 끝까지 구질구질한 인간이 됐다. 겨울이 뭐 이리 눅눅한지. 윤기는 몸에 꼭 맞는 수트 살이 달라붙어 오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연초의 역한 냄새가 수트와 끈적한 살 사이로 스미는 기분이었다. 토할 것 같았다.
축의금과 조의금
정호석 민윤기
정호석이 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나는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어요 형. 좋은 아빠가 되어 줄 거야 형도 알다시피 우리 아빠는 좋은 아빠는 아니었잖아? 그치만 나는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있어요. 한치의 악의도 없는 말간 웃음, 다정한 말투, 호의와 신뢰가 가득한 눈. 민윤기는 거기다가 욕한 번 못해보고 매번 고개를 끄덕여줬다. 천사가 따로 없지 착한 나의 호석이. 하지만 정호석과 천사는 공존할 수 없는 단어였다. 적어도 그딴 것도 말이라고 내뱉는 상대가 욕한 번 못 하고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여 보는 민윤기라면 말이다.
여하튼 그 새끼는 입에 달고 살던 결혼을 기어코 해냈다. 오늘, 지금, 민윤기가 뻑뻑 담배 피우는 뒤쪽 건물에서. 윤기가 힐끔 시계를 봤다. 식이 30여 분 남아있었다. 손목에 걸린 시계와 시계 옆에 안 어울리는 조악한 검정 팔찌. 끊어진걸 다시 묶고 또 끊어진 걸 다시 구질구질하게 이어붙여 몇년동안 민윤기 팔목을 조용히 옥죄던 그걸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건 구질구질한 미련도 어떻게 해보고자 하는 욕심도 아니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어디 가서 말도 못할 순정이었다.
윤기가 다시 아주 깊게 담배를 빤다. 폐 깊숙이 타르와 니코틴과 기타 등등의 발암 물질이 제 폐를 콱 죽여버리길 바라본다. 그러다 윤기는 당장에 식장으로 들어가 이 결혼은 성립할 수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이제 민윤기는 뭣도 아니었다. 애초에 뭔가 이긴 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비록 관계(일방적인 질척거림과 방치도 관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정리 당한지 반년도 채 안 됐을지언정 호석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 더 이상 형의 자리는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거라고. 진심으로 결혼할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 그 사람한테 좋은 배우자가 되어줄 거에요 형. 이게 씨발 거절을 고하는 건지 지 새로운 사랑을 고백하는 건지 여하튼 분명한 것은 민윤기가 정호석한테 더는 질척거리면 안 된다는 거였다.
어느새 짧게 탄 담배를 지져 끄고 윤기가 카악 퉤 침을 뱉었다. 이 담배조차도 정호석 때문에 끊고 정호석 때문에 피기를 반복한 고뇌의 부산물이라는 걸 너는 알까. 이제야 모르지 않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르지만, 이 습관과도 같은 애정을 어쩔 수는 없었다. 누렇고 탁한 가래침이 더럽게 시멘트 바닥에 들러붙었다. 제 감정의 부산물이 저렇게 추해보인다.
윤기는 이제야 지갑을 뒤적였다. 늦기 전에 태워야 할 게 있었다. 장장 십몇년 동안, 윤기의 지갑이 앙증맞은 목걸이 지갑에서 싸구려 천지갑, 그리고 지금의 가죽 지갑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지겹게 윤기의 민증 뒤를 지켰던 정호석 사진. 윤기가 주섬주섬 라이터를 켜 사진의 모서리부터 조지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진짜 진짜 다 끝이었다. 코팅된 종이가 조금씩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저 작은 불이 이 연약한 종이를 다 잡아먹을 터였고 그럼 이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사랑도 함께 끝내기로 며칠 전부터 다짐했다. 아마 뒤에서 쑥 나온 손이 사진을 가져가 눅눅한 바닥에 사진을 비벼 불을 끄지만 않았어도 정말 그렇게 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기가 뒤를 휙 돌았다. 얌전한 검은 머리에 검은 턱시도를 입은 호석이 싱긋 웃곤 사진을 툭툭 털어 다시 윤기의 지갑에 넣어 주었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 개새끼 씨발새끼 니가 이러니까 니가 이러니까 내가…….
고개를 들고 다 잠긴 목소리로 한자씩 씹어 뱉는데 금세 건물로 들어간 건지 어쩐건지 정호석은 보이지도 않았다.
민윤기 한결같이 좆같은 이 연애사인지 짝사랑사인지 여튼 정호석이랑만 얽히면 이렇게 씹스러울 수가 없다. 왜 하필 너여야 했지 왜 하필. 끝까지 밀어내지도 않고 받아주지도 않고 미친놈이 사진은 왜 다시 넣어주고 가는데 죽을 때까지 품고 살라는 거야 뭐야 어떻게 끝까지 지만 착한 놈이고 지만 좋은 놈이야 저 이기적인 새끼 좆같은 새끼.
식장 뒤에서 눈깔이 핏발 서게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이 꽉 물고 끝까지 눈에 힘주고 식장 들어가니 아까 사진을 다시 자기 지갑에 넣어 주던 손이 다른 사람 손 부여잡고 머리 뿌리 파 뿌리 될 때까지 미친놈에 사랑맹세를 하고 있으니 씨발 민윤기는 이제 돌다 못해 인생 그만 하직하고 싶을 수 밖에야.
식을 무슨 정신으로 눈깔 안 돌아가고 끝까지 봤는진 민윤기도 모를 일이었다. 예식장을 나오니 급하게 윤기의 손에 남준이 뷔페 식권을 쥐여준다.
"장난하냐?"
윤기의 날 선 반응에 남준이 넥타이를 대강 푸르며 혀를 찼다. 형 아까 보니까 축의금도 냈구만 밥은 먹고 가 돈 아까워. 윤기가 식권을 쭉쭉 찢었다.
"너는 씨발 내 친구면 이딴 걸 챙겨 줄 게 아니라, 됐다 씨발. 지금 와서 뭐 이딴 거 챙겨주면 니 속은 편하냐?"
작지 않은 윤기의 목소리에 남준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도 안다. 순 억지였다. 호석의 결혼 상대를 소개해준 게 남준이지만 그렇다고 결혼을 결정한 게 남준은 아니었으니. 윤기의 억지에 남준이 피곤한 얼굴을 했다.
"어떡하냐 내가. 둘이 좋아 죽겠다는데"
둘이 좋아 죽겠다는데, 둘이 좋아 죽겠다는데, 좋아 죽겠다는데, 죽겠다는데. 죽고 싶었다. 민윤기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에 뒤져버려야겠다고. 당장 죽지 않으면 정호석 자식새끼 돌잔치도 찾아가서 호구 짓을 자처할지도 모른다. 그렇게까지 하기 전에 그냥 죽어야겠다.
민윤기는 우는 대신 잘게 찢긴 종이 쪼가리를 남준에게 던졌다. 남준의 난처한 얼굴 뒤로 호석이 보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자신을 보는 호석의 시선이 너무 짜릿해서 윤기는 당장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죽을 거라고 너 때문에 뒤져버리고 말 거라고. 윤기는 제가 진짜 그럴 것 같아 남준을 밀치고 인파를 빠져나왔다. 뒤따라 오는 익숙한 구두 소리에 이번엔 눈물이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신랑이라는 새끼가 가서 우리 잘살겠습니다 행복하겠습니다 인사나 처하고 다닐 것이지 왜 또 따라오고 지랄이야 왜 나를 이렇게까지 만드니 대체. 민윤기는 대강 눈물이 소매에 문질러 닦고 흐린 눈으로 어찌어찌 비상구를 찾아 들어간다. 곧이어 열리는 문틈 사이로 너무나 사랑하는 체향이 스며든다. 윤기는 누군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냅다 멱살을 잡아 그를 벽에 밀어붙인다.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골랐을 실크재질의 부드러운 셔츠가 윤기의 손에 감긴다. 민윤기가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쥐어짜 낸다. 입을 벌리자 짠 게 입안으로 흐른다.
"잘 들어 나 뒤지면 유언장에 에이포 빡빡히 니 이름만 싸패새끼 마냥 적을 줄 알어 너 평생 그게 니 꼬리마냥 따라 다니게"
호석이 안타깝다는 웃으며 듯 윤기의 눈물을 닦아준다. 손길이 다정하다고 윤기는 생각한다.
"형 만약에 형이 진짜 죽어도 안 그럴 거 다 알아."
형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잖아요.
별다른 표정 없이 옷을 정리한 호석이 흰색 장갑을 낀 손으로 비상구의 문을 연다.
어깨를 툭툭 가볍게 털고 나간 이의 빈자릴 보며 이제 민윤기는 정호석이 내게 될 지도 모를 조의금 따위를 생각해본다. 적어도 제가 이 결혼식에 보탠 15만 원보단 성의 있기를.
전에 쓴 홉슈 사진 썰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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