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 28. 19:46
줄리앙의 목을 부여잡은 18살 민윤기의 손에 땀이 난다. 미술실 한켠에 일렬로 배치된 가슴팍에서 댕강 잘린 허연 석고상들의 시선이 따갑다. 민윤기는 제 핏기없는 손에 목이 부여 잡힌 줄리앙의 흉상을 본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흉내 낸 부분을 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민윤기 손에 힘이 들어간다. 목이 죄인 석고가 숨이 막힐 리도 없는데 되려 민윤기가 숨을 힘겹게 내쉰다. 민윤기가 발치의 이젤을 찬다. 우악스러운 발길에 이젤이 듣기 싫은 소릴 내며 넘어진다. 이젤 위의 나무판이 떨어지고 간당간당하게 나무 판과 종이를 연결하고 있던 집게가 분리된다. 볼품없는 종이가 윤기의 발치에 펄럭이며 떨어진다. 밀도가 낮게 올라간 줄리앙의 스케치가 못내 부끄러웠다. 가짜의 가짜의 가짜. 어릴 적 요절했다던 줄리아노 데 메디치, 그의 가짜이자 미켈란젤로의 역작 줄리앙 조각상, 그것의 싸구려 보급품인 지금 민윤기 손의 석고 흉상, 그리고 다시 민윤기 발아래 가짜의 가짜의 가짜. 민윤기가 발로 종이 근처로 굴러온 연필을 짓이긴다. 흉기 수준으로 길고 뾰족하게 깎인 4B연필이 비명을 지른다. 다시금 미술실 한켠의 일렬로 죽 늘어진 다른 석고들의 시선이 느껴져 민윤기가 고개를 휙 들어 그것들을 노려본다. 두 손으로 버겁게 쥔 석고가 무거웠다. 민윤기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차가운 석고에 닿는 손바닥이 아렸기 때문이었다. 손에서 줄리앙이 미끄러진다. 귀로 줄리앙이 석고 조각 따위로 죽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창밖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웃음소리와 여타 이야기 사이로 줄리앙이 죽는 소리가 묻힌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줄리앙이 있었다. 화방이든 미술학원이든, 그래 하물며 고등학교 미술실 따위에 그저 그냥 놓아진 석고상. 공장에서 찍어낸 아무 감흥도 일으키지 못하는 보급형 줄리앙. 하단엔 줄리아노 데 메디치노라고 음각이 새겨져 있고 측면으로 이 석고가 그저 찍어낸 석고임을 증명하듯 어설프게 줄이 가 있는 석고. 민윤기는 그 석고상을 부숴버릴 수밖에 없었다. 줄리앙의 코와 입술과 움푹 들어간 커다란 눈. 매끈한 눈썹 뼈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덩어리. 그래 봐야 싸구려 보급품인 주제에. 그것을 김석진이 만졌기에 어설픈 눈길로 훑었기에 되지도 않는 그림 실력으로 따라 그렸기에 멋적게 웃으면 윤기의 이젤에 눈길을 줬기에 민윤기를 보고 웃었기에 그따위 보급형 석고는 윤기에게 더 이상 그저 석고가 아니었다. 병신같은 민윤기 그제야 그 작은 관심이 그저 공장에서 찍어낸 보급형 줄리앙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에, 그날 민윤기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줄리앙을 죽인다. 김석진이 졸업하는 날이었다.
줄리앙 죽이기
JINxSUGA
w.heute
for. ㅂ
10년 만인가? 묻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석진이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벌써 시킨 거야? 잠깐만 나도 뭐 시키고 와야겠다. 윤기는 10년이 아니라 9년 9개월 만의 만남이라고 정정하진 않았다. 카운터에 서서 지갑을 꺼내 드는 석진을 힐끔 본 윤기는 손톱 거스러미를 뜯는다. 습관이었다. 입술이 말라서 눈 앞에 머그잔을 집어들었다. 석진이 진동벨과 물 한잔을 들고 걸어왔다. 진동벨은 자기 앞에, 컵은 윤기 앞에 놔준다. 밖에 많이 춥잖아 손이랑 볼이랑 아직 많이 빨가네 이 날씨에 무슨 아이스 아메리카노야. 석진이 내민 컵이 따듯했다. 윤기가 찬 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따듯했다. 석진식의 배려와 다정이었다. 그가 다정한 사람이었던가? 윤기는 물음을 띄웠다. 9년 9개월이 지나도 김석진은 김석진이었다. 윤기의 머리가 굳이 그를 미화하지 않아도 매끈하니 잘난 얼굴과 체형을 하고 있었다. 윤기의 사고가 괜히 뒤틀린다. 그래, 그래 봐야 김석진이었다.
만남은 우연 반과 의도 반이었다. 어쩌다 동창 하나와 연락이 닿았다. 윤기와는 그닥 친하지 않았고 석진과 친한 동창이었다. 외국 나갔다는 소식까진 들었는데 한국 언제 왔냐, 오면 연락 좀 하지 그랬냐, 너 카톡도 없어지고 외국 간다고 바로 잠수타서 서운했다 야 석진이 형도 너 많이 찾았어, 둘이 친했잖아, 언제 밥 한번 먹어야지 연락해라, 하는 일련의, 으레 하는 말 속에서 석진의 이름을 발굴한 건 윤기였다. 아, 석진이 형? 형은 잘 지내? 뭐 회사 다니느라 바쁘지 언제 한 번 셋이서 만나자. 어 그래, 그래야지. 연락처를 교환하고 윤기는 연락을 기다렸다. 그냥 왠지 연락이 올 것 같았다.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동창을 그냥 지나치기엔 다정한 친구인걸 알았다. 한두 달 뒤에 약속이 잡혔고 약속 일주일 전에 친구의 미안하단 연락이 왔다. 야 진짜 미안해서 어쩌냐 다음 달에 꼭 같이 보자 이번엔 석진이 형이랑 둘이 봐 둘이 많이 친했잖아 할 말도 많겠다 야. 타인에게 전해 듣는 과거의 관계성. 많이 친했던 형 동생. 정작 윤기 본인은 단 한 번도 석진과 친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석진이 머그잔을 잡고 안부를 물어왔다. 어떻게 지냈어 얼굴은 좋아 보인다, 그때보다. 윤기가 애써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때, 라는 단어가 거슬린다. 그냥 학교 졸업하고, 한국 온 지는 좀 됐어. 왔는데 연락 한 번 없었냐. 뭐, 연락처도 없고 이래저래. 근처에서 회사 다니나 봐, 어 그렇지 뭐.
의미 없는 대화가 오갔다. 석진의 인상은 더 서글서글해져 있었다. 빈틈없게 서글서글하네. 처음부터 끝까지 빼곡한 웃음기에 윤기는 자신도 모르게 떨던 다리를 멈췄다. 대화는 영향가가 없었고 윤기가 나누고 싶은 정보라곤 없었다. 석진이 서글한 인상으로 대화를 한없이 가볍게 만들고 있었다. 30분째 이어지는 김석진네 부서 막내 얘기 따위에 웃어주려 이 자리에 나온 건 확실히 아니었다. 윤기가 석진의 말을 잘랐다. 근데 형, 애인이랑 만난 지 꽤 됐나 봐요. 윤기가 석진의 약지를 보며 말했다. 하얀 자국이 꽤 선명한 왼손 약지를 석진이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눈썰미가 되게 좋네. 양 입꼬리가 비틀게 말려 올라간 석진의 입에 윤기가 구부정하게 말고 있던 허리를 펴며 등받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제야 익숙한 얼굴이었다.
"헤어졌어요?"
"음, 아니"
석진이 빨대로 자기 음료를 휘적거렸다.
"근데 왜 빼고 나왔어요."
민윤기의 직설적인 질문에 석진이 빈 손가락을 재차 매만졌다.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은 아니었다. 저 정도는 따로 노는 표정이 김석진다웠다. 민윤기가 이제 식어빠진 컵을 내려놓고 찬 머그잔을 들어 음료를 마셨다. 얼음이 입안에서 사각거렸다.
"그게 윤기 너한테 중요하니"
민윤기가 까득하고 얼음을 씹었다. 대답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중요한데 중요하다고 말해도 되나? 이걸 내가 드디어 9년 9개월 만에 전해도 되나? 윤기의 고민이 무색하게 석진이 입을 뗐다. 근데 내가 어디까지 말했지?
"아 그래, 그래서 지연이 너 지연이 알지? 걔를 거래처에서 만났는데 우리 막내가……."
이어지는 석진의 말이 민윤기의 귀를 타고 흘러 발끝으로 내려앉는다. 가볍다. 석진의 단어가, 그의 태도가, 우리의 대화가 단 한 번도 무게를 가져본 적도 없는 것 마냥. 순간 민윤기는 9년 9개월 전으로 회귀한다. 끊임없이 또 돌아간다.
윤기는 석고상을 그렸었다. 별다른 목표의식이 있어서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것들이 주는 차갑고 딱딱한 곡선에 매료되어있었다. 의미 없이 시간만 때우던 미술 동아리 시간에 이젤 앞에 말 없이 앉아 석고를 그리던 18살 민윤기한테 먼저 다가온 건 김석진이었고 그는 석고를 그리는 민윤기한테 관심이 많았다. 윤기가 그리고 또 그리고 물릴 정도로 그리던 줄리앙을 더듬던 석진의 손가락과 집중한 미간을 이젤에 삐딱하게 기대어 웃던 석진을 대체 민윤기는 어떤 수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조용한 미술실에서 윤기의 4B연필이 도화지를 스치는 소리가 좋다고 했다. 집중해 튀어나오는 윤기의 윗입술이 귀엽다고 했다. 그냥 한 소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석진을 향해 배알도 없이 달라지는 민윤기의 마음을 알았다면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다. 제가 가까이 갈 때마다 빨개지는 민윤기의 귀를 봤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석진에 말수가 적어지는 윤기를 알았다면 석진은 그만 했어야 했다. 그건 상도덕이었다고. 하지만 김석진은 김석진이었고 지금보다 노골적으로 말과 의도가 따로 노는 인간이었다. 석진은 손끝이 스칠 때마다 흠칫 놀라는 윤기를 알았기에 손을 잡았고 웃었다. 이제야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18살 민윤기는 차오르는 마음을 억누르고 손톱을 뜯고 아랫입술을 좆창냈고 김석진은 간신히 민윤기가 덮어 놓은 감정의 뚜껑을 푹 눌러 넘치게 만들고 줄줄 흐르는 것들을 관망했다. 분명 김석진은 그걸 재밌어했다. 민윤기 호구 등신이라도 눈치 없는 인간은 아니라 모를 수가 없었다고.
9년 9개월 후의 김석진은 그 짓거리를 또 한다. 가라앉는 윤기의 눈을 보는 표정에 슬며시 미소가 띈다. 빈 손가락이 허전했다. 윤기가 무의식적으로 쫓고 잇는 제 손가락을 의식하며 석진이 과장되게 웃으며 박수를 친다. 별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에 윤기가 입을 가리고 웃는다. 석진이 더 치밀하게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윤기도 제법 자라 이제는 모른 척 웃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석진이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낯으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가 아리게 추웠다. 윤기가 몸을 움츠리는 걸 보며 석진이 윤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때 많이 힘들었어?"
"뭐?"
윤기가 걸음을 멈췄다. 석진이 싱긋 웃는다. 추운지 볼이 발그레한 석진의 얼굴이 사랑스럽다. 사랑스러워서 민윤기는 이를 악물었다. 이 씹새끼가.
"힘들었냐고? 그게 씨발 할 소리에요?"
김석진 화법이 씨발스럽다. 빙빙빙 돌려 말하고 아닌 척 그런 말 한 적 없는 척 그런 의도가 아니었던 척 민윤기 개병신새끼라 직설적으로 이거는 이거라고 밖에 말하는 방법 외엔 알 질 못하니 시발 당연한 수순으로 김석진과의 대화에선 한 번을 이길 수가 없는 거다. 그때, 라니 그런 식으로 뭉뚱그려 말하면 남이 듣기엔 그저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 정도밖에 안 되지 민윤기 속에 그 좆만한 두 음절 아래 빙산이 있는데. 힘들었냐고? 이제 민윤기는 열불이 나고 울화가 치민다. 그래 또 나만 이러지 그때도 지금도 넌 멀쩡한데 나 혼자 착각하고 의미 부여하지 김석진의 다정한 웃음과 얼굴 배려들을 뭉쳐 석고를 빚으면 줄리앙의 형상일 것이다. 공장에서 찍어낸 그 가짜 조각. 오롯이 김석진의 자의로 관계는 늘 수면 밑이었다. 김석진이 관계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에 민윤기는 그저 이름 없는 걸 끌어안고 혼자 모노드라마나 쓰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김석진은 키스할 듯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장난이라고 웃는 인간이었고 민윤기는 나기를 생각에 파묻혀 지가 질식하는 것도 모르는 병신이었으니. 한 마디만 해주면 되는 거잖아 아니면 그냥 닥치면 되잖아 내가 지금 뭘 하재? 너랑 뒹굴고 싶대? 다 지났잖아 이제 그만해도 되잖아. 시발 형 김석진 나는 너랑 같은 공간 같은 소속에 묶여있던 2년 꽉 채워 내내 단 한 번도 널 안 좋아한 순간이 없었고 거기다 첫사랑 짝사랑이라는 아름을 붙였고 자 이제 넌. 작작 가지고 놀고 이제 끝나서 이어 붙이지도 못할 거 가지고 사람 돌게 하지 말고 말을 하라고 니 그 씨발스러운 화법 때려치우고.
이제 그만 이제 진짜 그만, 오래도 잡고있었다 그치만 이제 정말 죽여버릴 때가 왔다. 그게 좆같은 석고상이든 제 마음이든 김석진 장난질이든.
"윤기야, 그냥, 미안 나는 그러려고 그런게 아니었고 니가 한 번도 말한 적 없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니가 나한테 화를 내면 형이 좀 어이가 없지 않을까."
김석진 단어 하나하나에 민윤기 얼굴이 일그러진다.
줄리앙은 죽었다. 그날 민윤기가 죽였다. 조각조각 난 줄리앙을 종량제 봉투에 담았다. 다신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씨발 그날 줄리앙 그 개좆같은 석고 따위와 함께 이 마음도 버렸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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