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6. 11:11
목요일부터 꾸물꾸물하더니 기어코 비가 한 방울씩 떨어졌다. 남준은 방울져 흐르는 물을 탁탁 털고 깨끗하게 모습이 비치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모습을 확인한다. 자연스러운 머리 오케이 편한 고동색 면바지에 윤기가 생일 선물해준 니트 조끼 오케이 자주 입고 다녔던 남색 스웨이드 재질의 패딩과 살짝 꼬질해진 스니커즈 오케이 손에 들린 초밥과 트레이에 담겨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뜨끈한 유자차 한 잔까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신을 확인하고 한 번 씩 웃어 보인다. 보조개가 팬 얼굴이 들떠 보였다. 그때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등교 가는 듯한 학생들이 한 무더기 쏟아져 내린다. 남준은 머쓱하게 뒤통수를 쓸고 엘리베이터로 올라탄다.
우리는 아직 토독토독
김남준 민윤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남준이 자연스럽게 키패드를 누른다. 삑삑삑삑삑삑 단순한 여섯 자리를 누르고 문을 열면 따듯하고 아늑한 윤기의 보금자리가 나오는…….
정정한다. 나왔어야 했다. 남준이 입을 떡 벌리고 집 안을 훑었다. 집 안은 시간이 몇이신데 한 밤중 마냥 컴컴했다. 컴컴한 건 둘째 치고 왜 이렇게 추워? 남준이 내렸던 패딩 지퍼를 다시 올리면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까지 나 있는 그 짧은 복도에 발 디딜 틈 없이 옷이며 쓰레기 따위가 나 뒹굴고 있었다. 살짝 열려있는 윤기의 작업실을 힐끔 봤다가 남준은 제 눈을 찔렀다. 어디 강도한테 털렸다고 해도 믿을 만한 광경이었다. 윤기형? 거실을 지나 침실과 화장실을 기웃거려도 윤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아니 대체 거실 창문은 왜 열려있는 건데"
남준이 기가 막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활짝 열린 창문 앞엔 검은 암막커튼이 나부끼고 비가 새들었다. 아니 진짜 강도든거 아니야? 불안하게 핸드폰 홀드 버튼을 눌렀다 껐다 하면서 스산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에 서둘러 창문을 닫고 암막 커튼을 걷고 거실 불을,
"불 켜지 마라 김남준"
"힉-"
키려 했다 놀라 제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윤기가 창문 앞 안마 의자에 파묻혀있었다. 퍼런 다크써클이 윤기의 눈보다 크게 내려와 있다. 허옇게 질린 얼굴에 남준이 좋아하는 말랑한 입술엔 핏기도 하나 없었다.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윤기가 남준을 위아래로 훑는다. 형이 이르케 죽어가는데 너는 좋아 보인다? 빈정거리며 힘겹게 일어나더니 언제 그랬냐는 양 잽싸게 트레이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어 빨대도 없이 그대로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들이킨다. 아 형! 그건 내껀데!
윤기는 소설가다. 일단 누가 직업을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하곤 했으니 그게 사실이긴 할 거였다. 폭탄 맞은 듯 쌓여있는, 한때는 어떤 용도든 일상 생활에서 생산적으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을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윤기의 보금자리를 보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날 사직서와 함께 윤기가 대뜸 나 등단했다 하기 전까지 남준은 소설가에 많은 로망 혹은 편견이 있었다. 예를 들면 원목으로 된 고동색 서재 도서관 뺨치게 커다란 책장과 안경을 쓴 지적이고 살짝 예민해 보이며 말 하나하나가 문학적이고 감수성 풍부한 뭐 그런 거 말이다. 하지만 로망은 로망이었는지 윤기는 회사 다닐 때랑 별반 다를 거 없었다. 하긴 등단했다고 갑자기 사람이 바뀌는 것도 이상했다.
워낙에 감정표현이 없고 무뚝뚝한 형이라 처음 등단했다며 사직서를 흔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와 형이…. 형이 소설가라니. 아니 대체 글을 언제 쓴 거야? 아니 형이 소설을 쓴다고 무슨 논문을 쓴 것도 아니고? 몰아치는 질문에 윤기는 머적게 웃기만 했었다. 그렇게 퇴사한 윤기와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길 듯했으나 의외로 먼저 곧잘 연락을 해오곤 했던 건 윤기였다. 난 소설판 인간들 하곤 안 맞는 거 같다. 하나같이 왜 그렇게 예민한지 난 그냥 너 같은 놈이 편하더라구. 술기운에 열이 올라 발긋하게 말하는 민윤기가 어땠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사회생활 할 때 보다 독기가 빠져 밍숭한 얼굴의 안면 근육이 어떤 식으로 풀어졌는지. 어떤 옷 차림이었는지 어떤 자세로 그렇게 말했는지 그 술집의 조명이 어땠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졸리다며 제 어깨에 기대오던 머리에서 났던 샴푸 향과 택시 옆자리에 앉아 스쳤던 조금 축축했던 손의 감촉과 집 앞에 내려 현관 노오랑 조명등 아래서 휘던 입꼬리와. 그때의 윤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제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었는지. 빠진없이 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남준의 기억력이 유별나게 좋아서만은 아니었단 것은 그 유별나게 잘난 머리로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그 편하다는 말이, 이렇게 여러 방면으로 남준을 붙들 줄은 몰랐다.
'사귀는 거 아니였어요?'
'사귀기는 무슨 얘네 식 올렸잖아'
'네에?'
'장난치지 마 걍 친한 형이지'
'누가 그냥 친한 형이랑 매주 주말마다 만나고 마감 칠때는 먹을 거 싸들고 가고 형 야근하면 그 형이 데릴러 오고 맨날 통화하고 형 그냥 솔직히 말해요 나 그런거 편견없어'
'뭐? 민윤기가 먹을 거 싸들고 왔다고? 어휴 김남준 민윤기 대학 때는 그렇게 사랑싸움을 하더니 이젠 완전 부부 다 됐네 야 축하한다'
'왜 남의 장가길을 그렇게 막고 그러세요 진짜 아니라니까'
대학때부터 징하게 싸우면서도 붙어 다니는 남준과 윤기가 심심치 않게 듣던 말이었다. 2년 전까진 회사 선후배 사이로 그보다 6년 전에는 대학 선후배 사이로 어쩌다 보니 좋든 싫든 얼굴 맞대고 산지가 8년이었다.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저 형이랑은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는데 또 어쩌다 보니 굳이 자진해서 얼굴을 맞대는 사이가 되어있었다. 김남준 호구 똘추 새끼 어쩌다 꿴 사람은 없는데 지 혼자 코가 꿰여서.
남준은 명치 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토해냈다. 자연스럽게 다듬어놨던 머리가 어느새 남준을 비웃듯 흐트러져있다. 거울에 비친 저를 보며 남준이 허탈하게 웃으며 머리를 헝클였다. 아마도 오늘 만남에 정성 들였던 건 저 뿐인듯했다. 남준은 흡 숨을 들이마시고 소매를 걷는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남준 앞에 닥쳐있었다.
답지 않게 찡얼 거리는 윤기를 들처 매고 그나마 상태가 나은 침실로 향했다. 야! 발버둥까지 치는 엉덩이를 한 번 탁 찰지게 치곤 침대로 던졌다. 윤기가 무슨 생각인지 얼굴을 이상하게 꾸기고 엑스자로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린다. 뭐…. 뭔데. 뭐긴 뭐에요 어정쩡하게 앉아있는 윤기를 툭 쳐 넘어트리자 창백한 낯빛이 조금 붉어진다. 남준이 그런 윤기의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 이마를 콩 부딪힌다. 윤기 입술이 삐죽 튀어 나온다. 말랑말랑 거리는 입술을 톡 치곤 남준이 일어난다. 아 씨발 뽀뽀할뻔 했어. 참을 수 없이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가리곤 일어난다. 이불을 덮어 주고 방안 암막 커튼까지 꼼꼼히 쳐준 후 방문을 잡았다.
"우리 아직 그런 오해하기는 좀 빠르죠?"
남준은 악! 소리 지르는 윤기를 뒤로하고 비장하게 종량제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두기엔 윤기도 집도 상태가 너무 나빴다. 물론 남준도 청소에 재능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으어
굽힌 허리를 펴는데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얼추 사람 사는 집 같아진 공간을 한 번 훓고 냄비에 물을 올렸다. 마음 같아선 십이첩 반상이라도 차려주고 싶었으나 그 마음이 어떤 방식으로든 행동으로 옮겨지면 더 힘들어지는 건 윤기일게 뻔했다. 왜 신은 손재주로 갔어야 할 것까지 머리로 몰빵하셨을까 남준은 윤기가 들었다면 뒤통수를 쎄게 후려갈겼을 생각을 하면 초밥을 식탁에 놓고 미소된장국을 데웠다.
윤기는 예민하게 생겨선 대체로 잘 먹었다. 어 그러니까 잘 씹어먹었다. 맛있게 먹는 건 아니고 아니 본인 말론 맛있게 먹고 있다는데 깨작거려서 그런건지 보는 사람도 입맛 떨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근데 그것도 몇 년 보다 보니 언제가 진짜 깨작거리는 건지 언제가 맛있게 먹는 건지 구별이 되기 시작했다. 지금 윤기는 맛있게 먹고 있었다. 초밥을 뒤집어 생선이 아래로 향하게 집는다. 밥알의 이탈 없이 무사히 간장을 찍고는 한입에 와앙. 남준이 푸힛하고 웃는다. 푹 자서 띵띵 부은 얼굴로 윤기가 맛있는지 남준의 웃음에 갸웃하면서도 열심히 입을 움직인다. 중간 중간에 남준이 부지런히 까주는 짭짤한 완두콩을 집어 먹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얗고 울퉁불퉁한 손이 쬐꿈한 초록색 완두콩을 집는다. 부시시한 머리에 위아래론 좋아하는 회색 잠옷을 챙겨입고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윤기는 남의 속도 모르고 행복해 보였다.
"마감은? 잘 넘겼어?"
"아아 몰라
"형이 모르면 누가 알아"
"편집자가 알겠지 뭐. 내 손 떠났어"
마지막 피스까지 깔끔하게 클리어하곤 남은 미소된장국까지 후르륵 마신 윤기가 배부른지 배를 통통 두들기며 냄비며 식기를 들고 개수대로 향한다. 둬 내가 할게. 야 됐다. 내가 동생 불렀지 가정부 불렀냐.
"오 알긴 아네? 난 또 고맙단 말 한마디 없길래 모르는 줄."
"아 고맙다."
"엎드려 절 받기냐? 나 같은 동생이 어딨냐 고마운 줄 알어."
"아 졸라 고맙다 어 아주 친동생 삼고 싶다 어 너 이제부터 민남준 해라 아예 우리 집 들어와서 살래? 형이 짭짤하게 챙겨 줄게"
"웃기고 있네 돈도 못 벌면서 무슨"
"야 뼈 때리지 마라"
실없는 얘기가 오갔다. 윤기가 설거지하는 내내 남준은 옆에서 알짱거리며 괜스레 냉장고 문만 여닫는다. 친동생은 지랄, 울컥 올라오는 욕지거리도 삼키고 중간중간 내려오는 윤기 소매도 다시 걷어준다. 그러다 다 식어 버린 유자차를 들고 거실 소파로 가 자리를 잡는다. 커다란 담요를 두르고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고 있자 곧 윤기도 손에 물기를 대강 잠옷에 닦으며 소파로 파고든다. 2인용 소파에 구겨져 있는 꼴이 영락없이 고양이 한 마리다. 그 모습에 괜스레 몽글몽글해진 남준이 꼬고 있던 다리를 펴자 윤기가 은근슬쩍 머리를 디민다. 그 꼴이 귀엽고 웃겨서 남준의 볼에 보조개가 팬다. 덮고 있던 담요를 윤기한테 칭칭 감아주고 윤기의 등을 토닥였다. 토독토독 아직도 창문 밖은 침침하고 비가 창을 두들긴다. 보일러를 올렸는데도 집 안 공기가 아직 서늘하다. 윤기가 담요를 꽉 쥐고 남준 쪽으로 더 파고든다. 집안이 깨끗하고 담요는 보송보송했다. 남준한테서 깨끗한 섬유유연재 냄새와 달달한 유자 냄새가 난다. 배부른 고양이가 기분 좋게 골골거린다. 남준이 조심스럽게 윤기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제 꼴이 예민하고 작은 주인님을 모시는 집사 같아 다시 한번 남준의 볼에 보조개가 팬다. 그때 윤기가 눈만 치켜떠 뾰족하게 남준을 훑는다.
"너 요즘 자꾸 그런다?"
"뭐가"
"아니이…….자꾸…. "
"그니까 뭐가"
"아니 쫌 그런 게 있어"
고양이의 작은 귀가 붉다. 그래 서두를 거 없었다. 남준은 이 고양이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고 있었다. 친동생 어쩌네 해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두자.
의미 없이 채널을 돌리던 남준이 여행 채널에서 손을 멈춘다. 광활한 설원 위에 물결치는 색들이 펼쳐져 있다.
와 이쁘다.
형 오로라 본 적 있어?
아니 근데 보고 싶어 내 버킷리스트야.
형이 그런 것도 있어?
대체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음 글 쓰는 고양이?
참내.
형, 나랑 보러 갈래?
오로라?
응
무슨 남자 둘이서.
싫음 말고.
싫다는 게 아니구…. 너 휴가 언제 받는데.
여름에 써야지.
여름에도 오로라 볼 수 있어?
못 볼걸?
뭐야 그럼 또 겨울까지 기다려야 되네 이제야 초봄인데.
여름엔 딴 데 가면 되지.
어디?
글쎄 찾아보자.
그래 근데 자구 갈거야?
응 저번에 놔둔 옷 있지?
응응 빨아놨어
두런두런 말소리가 어느새 훈기가 감도는 집을 한참 울리다 잦아든다.
윤기에게 천천히 스밀 것이다. 아닌 척 해도 사람 손길에 약하고 잔정 많은 윤기임을 잘 안다. 한 방울 두 방울 토독토독 윤기를 두들기다 윤기가 정신 차렸을 땐 이미 주룩주룩 윤기를 한가득 적실 것이다. 남준은 어느새 고롱고롱 잠든 윤기를 쓰다듬다 저도 스르륵 눈을 감는다.
제가 평소 쓰는 스타일의 글은 아니지만 편하게 읽히는 따땃한 그런 걸 써보고 싶었습니다~ 랩슈는 처음 써보는데 여튼 편안하게 읽어 주셨으면 좋겠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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