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춰섰다. 뒤따라오던 얘가 내 등에 코를 박았다. 씨발....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평소 같으면 뒤돌아 되받아쳤겠지만,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침을 꼴깍 삼키고 난간을 꽉 붙잡았다. 뒤에 있던 걔가 나를 앞질러 계단을 오르며 나를 쳐다봤다. 다리를 툭 차면 툭 부러질 것처럼 마른 놈이었다. 걔 친구들이 뭐라고 욕지기를 뱉어냈다. 근데 그딴거 다 안 들리고 꽉 찼다. 내 눈깔에. 이지훈이. 아 쟤는 어떻게 저렇게 웃을까.

 

 

 

 

 

  이 사랑의 끝이 궁금해

  이지훈 권순영

 

 

 

 

 

 

나는 원래가 그랬다. 사랑받고 싶다. 나는 단언컨대 사랑스러운 애였다. 열일곱 처먹은 시커먼 남자애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사랑스러우니까. 난 좀 적당히 웃기고 적당히 잘생겼고, 또 좀 많이 귀여웠다. 진짜다. 관심 받는 게 좋고 세상이 내 위주로 돌아가면 더 좋았다. 나보다 잘난 놈이 있으면 그놈한테도 사랑받으면 되는 거였다. 그런 면에서 이지훈은 좀 짜증 나는 스타일이었다. 저거는 진짜다. 저 새끼는 진짜 세상이 지 위주로 흘러갔다. 나처럼 주위가 자기 위주로 흘러가게 애쓰는 놈이 아니라, 자기 흥미 밖이면 그냥 신경도 안 쓰는 진짜 마이웨이. 처음부터 재수가 없다 했다. 그런 놈은 나도 신경끄면 되는 일인데 문제는 내 주위에서 그놈한테 신경을 안끄니 문제였고, 짜증 나는 건 나 같은 인간관계 노력파는 그런 인간관계 재능충한테 첨부터 비교가 안 된다고, 그놈은 지 할 일만 하고 지 하고 싶은 소리만 지껄이면서 주위에 사람을 끄는 개좆같이 부러운 재주가 있었다.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수업 시간엔 처자고 중간고사는 반에서 3등하고 말은 별로 없는데 가끔 존나 골때린 소릴 해서 애들이 좋아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운동을 종목 안 가리고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농구는 빼고) 다 잘해서 체육시간 점심시간 애들한테 이리저리 불려 나갔고 또 게임이라면 모바일 게임이든 저기 피시방 가서 씨발개발하며 키보드 두들기는 게임이든 다 잘했다. 게임도 좆도 못하고 구기 종목이라면 박수 짝짝 치면서 구경하는 게 도와주는 거인 나랑은 천지 차이였다. 생긴 건 그냥 그랬는데, 진짜 좆만 해서 아주 우리 반 귀염둥이였다. 권순영 인생사 귀여움의 대명사 자릴 뺏긴 건 동생 태어나고 나선 처음이었다. 성격은 지랄맞았는데, 어째 애들은 그걸 더 좋아했다. 아니 저게 대체 뭐가 귀여운데?

 

여튼 그러한 불순한 이유로 권순영은 이지훈 껌딱지가 되다. 말했지 않았는가 나보다 잘난 놈이면 그놈한테도 사랑받으면 되는 거라고.

 


이지훈 껌딱지 2주째. 권순영은 생각했다. 아 이 새끼 쫌 귀엽네. 자꾸 치대니까 싫다고 싫다고 짜증내던 게 날씨가 더워지면서 자연히 치대는 횟수가 줄어드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거다. 하얀 살쾡이 같은 게 힐끔 아닌 척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슬금슬금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렸다.


 

 

다시 이지훈 살짝 밀당 중인 껌딱지 1달째. 권순영은 다시 생각했다. 아 이 새끼 존나 귀엽네. 이지훈은 아이스크림을 물고 뾰루퉁하게 앉아있었다. 미술 시간에 조별 숙제가 있었는데 이지훈 지옥에서 올라온 그림 실력을 아는 내가 스리슬쩍 이지훈 손을 뿌리치고 다른 조로 와서 삐진 상태였다. 나는 달달한 복숭아 아이스크림을 물려주고 이지훈을 살살 달랬다. 지훈아 생각해봐 너도 똥손이고 나도 똥손인데 우리 둘이 붙어있으면 쌍똥손이잖아, 그럼 우리랑 같은 조인 애들은 무슨 죄야, 응?

 

 


 

또다시 이지훈 껌딱지 3달째. 권순영은 또 생각이란 걸 해보았다. 내 눈깔이 넹글 돌아버린 걸까. 끔뻑. 크지도 않은 눈을 감았다 떠봐도 이지훈은 이지훈이었고, 놀랍게도 밍숭맹숭 그냥 그래 보였던 얼굴에서 후광이 비췄다. 잘생겼다. 잘생겼어. 뭐지?

 

 

 


 

 

그리고 시간은 또 흘러 7월의 어느 날, 권순영은 정오의 땡볕 아래 운동장 스탠드에서 인상을 구긴 채 이프로를 들고 앉아있었다.

 

하복 셔츠는 하얗고 이지훈은 더 하얬다. 상식적으로 사람이 흰색 교복 셔츠보다 하얄 순 없지만 여튼 내 눈엔 그랬다. 희고 차갑고 작고 귀엽고 무서운 이지훈은 신나게 좆만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고 있었다. 땀에 젖은 축축한 하복 셔츠가 등에 착 달라붙어 살색이 언뜻언뜻 비쳤다. 뛰는 건 이지훈인데 괜히 땀이 흘렀다. 이지훈이 축구공을 뻥 찼다. 공이 부웅 뜨며 날았다. 나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축였다. 얼룩덜룩한 공은 이리저리 발에 치이다 이내 다시 이지훈 쪽으로 날아갔다. 어어!! 애새끼들이 소리 지르며 우르르 몰려간다. 그 애들이 채 공 근처로 가기 전 공은 이지훈 장갑 낀 손으로 빨려가듯 턱 잡힌다. 삐익!!! 누군가 경기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를 분다. 공으로 우르르 몰려갔던 애들이 이번엔 이지훈한테 몰려간다. 누구는 이지훈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누구는 땀에 젖은 걔의 머리를 아랑곳 안 하고 탈탈 턴다. 이지훈이 이가 보이게 활짝 웃는다. 아주 멀리 있는데 얇은 입술 옆 보조개기 또렷하게 보였다. 공이 텅 빈 운동장을 혼자 도르르 굴러간다. 공을 빤히 보다가 나는 서둘러 이프로를 들고 뛰었다. 벌써 어디서 난 건지 모를 물을 벌컥벌컥 마시던 이지훈이 나를 한 번 이 프로를 한 번 보더니 물병을 옆 애에게 넘기고 손을 내밀었다. 내꺼 아니냐?

 

"와 진짜 주기 싫게 말한다."

 

이지훈이 키득거렸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웃음에 박한 놈이 이겨서 기분 좋아 보였다. 워낙에 승부욕이 강한 애니까. 문득 내가 얘를 이길 날이 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지훈이 가볍게 내 뒤통수를 치곤 나를 학교 건물 안으로 잡아끈다. 차가울 것만 같았던 시리도록 하얀 살갗은 놀랍도록 뜨거운 열기로 내 팔목을 쥔다. 뛰는지도 몰랐던 팔목에 맥박이 엉망진창으로 뛴다.

 

 

 

 

 

 

점심시간 후 여름의 교실은 그 특유의 나른한 잠기운과 훅 끼쳐오는 어지러운 땀 냄새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이지훈이 있다. 뭐 권순영 마음 한가운데 있다,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한가운데 있었다. 2분단 3번째 줄 교실 천장에 달린 네모난 에어컨 바로 아래 그리고 그 옆에 책상 사이 복도를 두고 3분단 3번째 줄에 내가 있었다. 이지훈이 가뜩이나 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야 이지훈 깨워라!"

 

수학이 교탁을 탕탕 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지훈을 깨워줄 이지훈 짝꿍도 기절상태였다. 내 짝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이지훈 깨워. 나는 어쩔 수 없는 척 의자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이지훈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이지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걔의 세모난 눈과 내 쫙 찢어진 눈이 마주쳤다. 잠에 취한 동공이 순간 수축하며 세상을 담아내는 그 까맣고 조그만한 우주 속에 내가 있었다. 점심시간 땡볕에 뛰어다니던 이지훈만큼이나 상기된 얼굴을 한. 그리고 그때, 그 한여름 한낮의 교실 한가운데에서 나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쉽게 내 감정에 이름을 붙여버렸다. 

 

 


그날은 도무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엄마한테 에어컨 틀어달라며 징징거리다 등짝을 한 대 시원하게 맞고 얇은 여름 이불을 둘둘 말아 다리 사이에 끼곤 침대에 누웠다. 너무 더웠다. 습하고 찐덕했다.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고 창문도 죄다 열어젖혔다. 거실에 있던 선풍기도 질질 끌어다 침대 바로 앞에 두었다. 강풍을 틀어 놓고 한참을 그 앞에서 멍 때라다 미풍으로 바꾸고 이불을 끌어안았다. 이지훈이 생각났다. 선풍기 바람으로 식혀놨던 몸이 다시 찐덕해졌다. 습-하! 수영하는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 마시고 내뱉었다. 습도 때문에 반쯤은 물에 잠긴 기분이었다. 팔목이, 명치가, 발목이 두근거렸다. 온 몸의 맥박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 감각이 사랑스럽다고 느껴졌고 순간 나는 문득 깨닫는 것이다.

 

 

감정은 이름을 붙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파도를 몰고 온다. 있는지도 몰랐던 망망대해가 뒤돌아 도망갈 시간도 주지 않고 발에서 다리로 다리에서 명치로 명치에 찰랑이는 짠 내를 맡는 순간 이미 질식해버리게. 여름은 덥고 이지훈은 하얬다. 그렇기에 나는 발끝으로 찰랑이는 그것들이 못내 반가웠다. 못내 사랑스러웠다. 죽을 것 같던 태양의 열기마저 사랑스러운 한여름이었다. 나는 잠 못 이루는 이 열대야에 얇은 이불을 끌어안고  끝없이 바다를 토해내는 가슴을 안고 이 사랑의 끝을 상상한다.

 

그날 권순영은 생각한다. 열대야의 불면마저 아름답게 만드는 이 감정의 끝은 분명, 사랑스러울 것이라고.

 

 

 

 


짧은 외전, 저 감정의 끝이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새개새 본편을 참조해주세요.

'rps > sv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웆, 원홋, 웆홋] 꼬리잡기  (0) 2021.02.07
[원홋, 전웆, 웆홋] 이새개새 (1~5화)  (0) 2021.02.07
내 유언장에 니 이름  (0) 2020.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