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유언장에 니 이름

2020. 1. 29. 04:05

축의금 만원만 넣을걸.



권순영이 길게 담배를 빨았다. 아까웠다. 만 원짜리 5장이나 들어간 돈 봉투가 아까웠다. 그 돈이면 담배가 열 갑인데 시발. 찌질하고 소소한 분노가 일었다. 그 형과의 관계에선 죄다 그 모양이었다. 하나 줄 거 5개나 줘버리고 이미 줘버린 거 찌질하게 아까워나 하지 말지 뭐가 다 그리 아깝고 아쉬워서 끝까지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인간이 됐다. 겨울이 뭐 이리 눅눅한지 순영은 몸에 꼭 맞는 수트가 살이 달라붙어 오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연초의 역한 냄새가 수트와 끈적한 살 사이로 스미는 기분이었다. 토할 것 같았다.









내 유언장에 니 이름

윤정한 권순영











정한이 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 있었다. 나는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어 순영아. 좋은 아빠가 되어 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아빠는 좋은 아빠는 아니었잖아? 그치만 나는 좋은 아빠가 될 자신이 있어. 한창 백금 발에 가까운 오대오 탈색 머리에 얕은 컬이 들어간 머릴 하고 다닐 때여서 그렇게 말하는 비주얼이 꼭 천사같았다. 왜 이지훈이 저 형 풀네임이 정한 미카엘 윤이라고 하는지 설득되는 비주얼. 근데 그딴 것도 사람새끼가 뱉는 말이라고 뱉고 앉아있는 상대가 현재 교제 중인 제 연하남친인 경우, 이 새끼와 천사는 공존할 수 없는 단어였다. 그 당시 교재 중이던 연하남친 당사자인 권순영한테는 말이다. 여하튼 그 새끼는 입에 달고 살던 결혼을 기어코 해냈다. 오늘, 지금, 권순영이 뻑뻑 담배 피우는 뒤쪽 건물에서. 순영이 힐끔 시계를 봤다. 식이 10분 남아있었다. 이 시계도 정한이 골라준 꽤 고가의 시계였다. 그치만 버릴 수 없었다. 골라준 거지 산 건 순전히 순영의 돈이었기에 절대 버릴 수 없었다. 순영이 다시 아주 깊게 담배를 빤다. 폐 깊숙이 타르와 니코틴과 기타 등등의 발암 물질이 제 폐를 콱 죽여버리길 바라본다. 그러다 순영은 당장에 식장으로 들어가 윤정한은 내 남자친구니 이 결혼은 성립할 수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이제 권순영은 윤정한의 귀여운 연하남친 같은 게 아니었다. 비록 차인지 일주일도 안 됐을 지언정 정한은 확실히 순영에게 이별을 고해왔다. 진심으로 결혼할 사람을 사랑하게 됐어. 그 사람한테 좋은 배우자가 되어줄 거야 순영아. 이게 씨발 이별을 고하는 건지 지 새로운 사랑을 고백하는 건지 여하튼 분명한 것은 권순영은 윤정한한테 더는 질척거리면 안 된다는 거였다.



어느새 짧게 탄 담배를 지져 끄고 순영이 카악 퉤 침을 뱉었다. 이 담배조차도 정한이 가르쳐 준 거였다. 분명 그땐 멋있어 보였는데 멋있긴 개뿔. 누렇고 탁한 가래침이 더럽게 시멘트 바닥에 들러붙었다. 순영은 지갑을 뒤적였다. 늦기 전에 태워야 할 게 있었다. 장장 10년 동안 순영의 지갑이 앙증맞은 목걸이 지갑에서 싸구려 천지갑, 그리고 지금의 브랜드 가죽 지갑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지겹게 순영의 민증 뒤를 지켰던 윤정한 폴라로이드 사진. 순영이 주섬주섬 라이터를 켜 사진의 모서리부터 조지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진짜 진짜 다 끝이었다. 코팅된 종이가 조금씩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조금 있으면 저 작은 불이 이 연약한 종이를 다 잡아먹을 터였고 그럼 이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사랑도 함께 끝내기로 며칠 전부터 다짐했다. 아마 뒤에서 쑥 나온 손이 사진을 가져가 눅눅한 바닥에 사진을 비벼 불을 끄지만 않았어도 정말 그렇게 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순영이 뒤를 휙 돌았다. 얌전한 검은 머리에 검은 턱시도를 입은 정한이 싱긋 웃곤 사진을 툭툭 털어 다시 순영의 지갑에 넣어 주었다. 죽여버리고 싶었다.



이 개새끼 씨발새끼 형 니가 이러니까 뒤에서 나한테 개까이는 거야 씹새끼야



다 잠긴 목소리로 한자씩 씹어뱉는데 금세 건물로 들어간건지 어쩐건지 윤정한은 보이지도 않았다.



권순영 한결같이 좆같은 이 연애사인지 짝사랑사인지 여튼 윤정한이랑만 얽히면 이렇게 씹스러울 수가 없다. 끝까지 밀어내지도 않고 받아주지도 않고 미친놈이 사진은 왜 다시 넣어주고 가는데 죽을 때까지 품고 살라는거야 뭐야 어떻게 끝까지 지만 착한 놈이고 지만 좋은 놈이야 저 이기적인 새끼 좆같은 새끼.



식장 뒤에서 눈깔이 핏발 서게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이 꽉 물고 끝까지 눈에 힘주고 식장 들어가니 아까 사진을 다시 자기 지갑에 넣어 줫던 손이 다른 사람 손 부여잡고 머리 뿌리 파 뿌리 될 때까지 미친놈에 사랑맹세를 하고 있으니 씨발 권순영은 이제 돌다 못해 인생 그만 하직하고 싶다.









식을 무슨 정신으로 눈깔 안 돌아가고 끝까지 봤는진 권순영도 모를 일이었다. 예식장을 나오니 급하게 순영의 손에 지훈이 뷔페 식권을 쥐여준다.


"장난하냐?"


순영의 날 선 반응에 지훈이 넥타이를 대강 푸르며 혀를 찼다. 야 아까 보니까 축의금도 냈구만 밥은 먹고 가 돈 아까워. 순영이 식권을 쭉쭉 찢었다.


"너는 씨발 내 친구면 이딴 걸 챙겨 줄 게 아니라 니 누나가 결혼한다고 하자마자 그 새끼 내 남친이라고 말을 했어야지 안 그러냐? 지금 와서 뭐 이딴 거 챙겨주면 니 속이 편하냐?"

작지 않은 순영의 목소리에 지훈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하냐 내가. 둘이 좋아 죽겠다는데"



둘이 좋아 죽겠다는데, 둘이 좋아 죽겠다는데, 좋아 죽겠다는데, 죽겠다는데. 죽고 싶었다.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장에 뒤져버려야겠다고.



권순영은 우는 대신 잘게 찢긴 종이 쪼가리를 지훈에게 던졌다. 지훈의 뒤로 정한이 보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자신을 보는 정한의 시선이 너무 짜릿해서 순영은 당장에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었다. 죽을 거라고 너 때문에 뒤져버리고 말 거라고. 진짜 그럴 것 같아 지훈을 밀치고 인파를 빠져나왔다. 뒤따라 오는 익숙한 구두 소리에 이번엔 눈물이 흐르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신랑이라는 새끼가 가서 우리 잘살겠습니다 행복하겠습니다 인사나 처하고 다닐 것이지 왜 또 따라오고 지랄이야 왜 나를 이렇게까지 만드니 대체. 순영이 대강 눈물이 소매에 문질러 닦고 흐린 눈으로 어찌어찌 비상구를 찾아 들어갔다. 곧이어 열리는 문틈 사이로 너무나 사랑하는 체향이 스며들었다. 순영은 누군지도 확인하지도 않고 냅다 멱살을 잡아 그를 벽에 밀어붙였다.



고심하고 또 고심해서 골랐을 실크재질의 부드러운 셔츠가 순영의 손에 감겼다. 순영이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쥐어짜 낸다. 입을 벌리자 짠 게 입안으로 흐른다.



"형 니 잘 들어 나 뒤지면 유언장에 에이포 빡빡히 니 이름만 싸패새끼 마냥 적을 줄 알어 너 평생 그게 니 꼬리마냥 따라 다니게"



정한이 안타깝다는 웃으며 듯 순영의 눈물을 닦아준다.



"순영아 만약에 니가 진짜 죽어도 안 그럴 거 다 알아."







너는 죽어도 나한테 나쁘게 못 하는 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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